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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수어

말레이시아의 수어 관련 법과 제도– 청각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제도적 기반과 그 진화

수어는 단순한 손동작 이상의 의미를 가진 언어다. 특히 청각장애인에게 있어 수어는 일상 소통의 수단이자, 교육·사회 참여·문화 형성 등 삶의 전반에 걸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어를 보호하고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기반은 청각장애인의 권리 실현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BIM(Bahasa Isyarat Malaysia)을 청각장애인의 공식 수어로 인정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과 법적 장치를 점진적으로 마련해 왔다. 이 글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수어와 관련된 법과 제도는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 왔는지, 현재의 현실은 어떠한지, 그리고 향후 과제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말레이시아의 수어 관련 법과 제도
– 청각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제도적 기반과 그 진화


1. 말레이시아 수어의 공식 인정과 제도화의 시작

말레이시아에서 BIM은 1998년, 사회복지부(Jabatan Kebajikan Masyarakat)에 의해 청각장애인을 위한 공식 수어로 인정되었다. 이 선언은 BIM이 단순한 비공식 수단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언어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인정’은 법률적인 구속력을 가진 조항이라기보다는 정책적인 선언에 가까웠으며, BIM을 실질적으로 제도에 통합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후 말레이시아 정부는 BIM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법과 정책에 반영해가기 시작했다.


2. BIM과 관련된 주요 법률 및 제도

(1) 장애인 권리법(Persons with Disabilities Act, 2008)

2008년에 제정된 이 법은 말레이시아 장애인의 전반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 법률이다. 이 법안에는 수어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지만,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권과 정보 접근권을 언급하며 BIM의 필요성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법을 기반으로 청각장애인이 공공기관, 병원, 교육기관 등에서 적절한 커뮤니케이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2) 수어 통역 서비스 제도

사회복지부는 수어 통역사 파견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공공행사나 의료 서비스, 법률 지원 등 다양한 상황에서 BIM 통역사가 배치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방송 브리핑에 BIM 통역사를 등장시킨 것은 청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법률에 의한 직접적인 강제는 아니지만, 정책 시행 지침의 형태로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3) 특수교육 정책 내 수어 도입

말레이시아 교육부는 특수교육 커리큘럼 내에서 BIM을 공식 교육 언어로 활용하고 있으며, 청각장애 학생이 수어를 기반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BIM 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수어에 능통한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은 단지 학습의 도구로서 수어를 활용하는 것 이상으로, 수어의 지위와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3. 법과 정책의 한계와 과제

말레이시아는 분명 수어 관련 법과 제도를 점차 확장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

(1) 헌법적 지위의 부재

현재 말레이시아 헌법이나 국가 언어 정책에는 BIM이 독립적인 언어로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BIM이 사회 전반에 공식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특정 정책이나 부서에만 국한된 지원을 받는 결과로 이어진다. 법률적 차원에서 BIM의 공식 언어 지위를 보장하는 조항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청각장애인 단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2) 통역사 부족과 자격 제도의 미비

말레이시아에서는 수어 통역사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고 있지만, 이에 상응하는 양성과정과 자격 제도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다. 통역사의 수준도 들쭉날쭉하며, 자격 기준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뢰도와 전문성 문제도 제기된다.

이러한 상황은 청각장애인의 공정한 정보 접근과 공공서비스 이용을 어렵게 만들 수 있으며, 제도적 개선이 시급한 영역이다.

(3) 지방과 농촌 지역의 제도 접근성

수어 관련 법과 제도가 수도권이나 도시 지역 중심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아, 지방이나 농촌 지역의 청각장애인은 이러한 제도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수어 교사나 통역사의 부족, 수어 교육 인프라의 부족 등이 주요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4. 향후 전망과 기대되는 변화

말레이시아는 국제적으로도 수어 사용과 관련된 인권 흐름을 수용하고 있으며, 유엔 장애인권리협약(UNCRPD)도 비준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향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제도가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 BIM의 헌법적 지위 확보 또는 별도의 수어 법 제정
  • 수어 통역사 자격 제도의 법제화 및 표준화
  • 공공기관 내 수어 통역 배치 의무화
  • BIM에 기반한 디지털 접근성 강화
  • 민간 부문의 수어 인식 확대 및 수용 의무 부과

이러한 변화는 단지 청각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문화·다언어 사회로서 말레이시아가 더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결론: 수어의 법적 보호는 권리 보장의 출발점

말레이시아 수어는 청각장애인의 삶의 질과 직결된 언어이며, 이를 보호하는 법과 제도는 단순한 복지의 차원을 넘는 인권의 문제다. 아직 BIM은 법적으로 완전히 보호받고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지금까지의 발전과 사회적 인식의 확대는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앞으로 수어가 단지 소수의 언어가 아닌, 공공의 언어로서 당당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기반이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 언어는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수어 역시 그에 걸맞은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