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레이시아 수어

말레이시아 수어와 말레이시아 수화 언어 정책– BIM의 공적 지위와 언어 권리 확보의 흐름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다언어 국가로서 수많은 언어와 방언이 공존하는 독특한 언어 환경을 갖고 있다. 이 안에서 말레이시아 수어(Bahasa Isyarat Malaysia, 이하 BIM)는 오랜 시간 동안 청각장애인 공동체의 의사소통 수단이자,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고유 언어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BIM이 하나의 ‘공적 언어’로 인정받고, 정책적으로 보호받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이 글에서는 BIM이 말레이시아 사회 속에서 어떤 정책적 변화를 겪어왔는지, 그리고 현재 BIM 관련 제도와 활용 현황은 어떤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말레이시아 수어와 말레이시아 수화 언어 정책– BIM의 공적 지위와 언어 권리 확보의 흐름


1. BIM의 등장과 공식 인식의 시작

말레이시아에서 BIM은 1960~7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다양한 지역 수어와 외국 수어(특히 미국 수어, ASL)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BIM은 점차 통일된 형태로 정비되었고, 1998년 말레이시아 정부가 BIM을 ‘청각장애인을 위한 공식 수어’로 인정하면서 정책적 변화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단순한 인정만으로 BIM이 교육, 공공기관, 사회 전반에 고르게 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의 정책 흐름과 실천이 중요했다.


2. 정부 정책 속 BIM의 공식적 위상

BIM이 법적으로 명시되거나 보호받는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1) 사회복지부(Social Welfare Department)의 수어 지원

말레이시아 사회복지부는 BIM의 사용을 권장하고 수어 통역 서비스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왔다. 특히 공공기관 내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 제공이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코로나19 시기에는 정부 브리핑에서 공식 수어 통역이 도입되어 대중의 인식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2) 교육부의 수어 교육 도입

말레이시아 교육부는 특수 교육 과정 내 BIM 도입을 공식화했으며, 초·중등학교에서 청각장애 학생을 위한 수어 기반 커리큘럼이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교사 양성과정에서 수어 역량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3) 방송 및 언론에서의 활용

공영방송에서는 뉴스 및 주요 행사에 수어 통역이 병행되며, 수어 통역사가 방송 화면에 함께 등장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는 청각장애인뿐 아니라 많은 대중이 수어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3. 말레이시아 수화 언어 정책의 핵심 과제

말레이시아는 BIM(Bahasa Isyarat Malaysia)을 자국의 공식 수화 언어로 인정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제도화는 여전히 미흡한 상태다. BIM의 사회적, 법적 지위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서 수화 사용자들이 다양한 차별과 제한을 겪고 있다. 다음은 BIM 정책이 안고 있는 주요 과제들이다.

(1) 공식 언어 지위의 불명확성과 법적 기반 부족

BIM은 2008년 사회복지부에 의해 공식 수화로 인정받았지만, 헌법이나 국가 언어 정책 내에서는 명확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BIM 사용은 상황과 기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며, 수화 사용자의 언어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 BIM의 헌법적 지위 명문화와 언어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

(2) 교육 분야에서 BIM 활용의 제한

청각장애 아동 교육에서 BIM은 보조적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구화 중심의 접근 방식이 우세하다. 이는 언어 습득에 있어 BIM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BIM을 정식 교육 언어로 도입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교사 양성과 교육과정 정비가 시급하다. 언어 환경 자체를 BIM 중심으로 재구성할 필요도 있다.

(3) 수어 통역 인프라의 부족

공공 서비스, 법원, 병원, 방송 등에서 BIM 통역 제공은 제한적이며, 통역사의 수와 전문성 모두 부족한 상황이다. 이는 청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권과 표현권을 침해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국가 차원에서 통역사 양성 시스템을 정비하고, 자격 인증 제도와 배치 기준을 체계화해야 한다.

(4) 청각장애인 공동체 내부의 언어권 인식 부족

청각장애인 공동체 내에서도 BIM을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인식하는 수준은 높지 않다. 사회 전반적으로 BIM은 단순한 의사소통 보조 수단으로 간주되곤 한다. BIM이 완전한 언어 체계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언어권이 인권의 일부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수화의 다양성과 표준화 간의 긴장

말레이시아 내에는 BIM 외에도 지역별 수화나 민간 수화 방식이 존재한다. BIM을 국가 표준 수화로 지정하면서도 언어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균형 잡힌 정책이 요구된다. 지나친 표준화는 지역 수화의 소멸을 초래할 수 있으며, 수화 사용자들의 정체성과 소속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4. 대중이 체감하는 변화와 향후 기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BIM 관련 정책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과거에는 청각장애인이 공공 서비스에서 소외되는 일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수어 통역을 통해 정보 접근이 가능해졌고, 교육 현장에서도 점차 수어가 보편화되고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의 진전이 기대된다:

  • BIM의 헌법 또는 언어법 내 공식 언어로의 명문화
  • 수어 통역사 양성 및 자격 제도 확립
  • 공공기관 및 교육기관 내 수어 사용 의무화
  • 민간 기업의 수어 접근성 보장 제도 도입

이러한 방향은 단순히 청각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어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중시하는 포괄적 사회 실현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될 수 있다.


결론: 언어는 권리이며, 정책은 다리를 놓는 일이다

말레이시아 수어 정책은 아직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BIM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정책적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언어의 권리가 보장된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청각장애인의 삶의 질, 자율성, 문화적 정체성과도 직결된다.

앞으로 말레이시아 정부와 시민사회가 BIM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질적인 제도화를 이뤄낸다면, BIM은 단지 수어를 넘어서 말 없는 언어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언어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